세계유산 - 남한산성의 장대, 행궁
우리나라 세계유산 - 남한산성의 장대, 행궁을 알아봅니다.
남한산성 : 주요시설 및 건축물 - 장대,행궁
남한산성은 외부에서는 성 내부를 볼 수 없는 잘 만들어진 천혜의 요새다.
남한산성은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24 km, 성남시에서 북동쪽으로 6km 떨어져 있는 남한산(광주시 중부
면 산성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길이는 9.05km, 높이는 7.3m 이다. 원래 2천여년 전, 고구려 동명왕의
아들 백제의 시조 온조왕 때 쌓은 토성이었으나, 이를 신라 문무왕 때 다시 쌓아 '주장성'을 만들고, 그
옛터를 활용하여 후대에도 여러번 고쳐 쌓다가, 조선조 광해군 때(1621) 본격적으로 축성하였다 한다.
수 어 장 대 (守 禦 將 臺)
1624년(인조 2) 남한산성을 축조할 때 지은 4개의 수어장대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중요한 건물이며, 수어청의 장관(將官)들이 군사를 지휘하던 곳이다. 하부 구조는 자연석을 허튼층으로 쌓은 낮은 축대 위에 한 단 높여 다듬은 돌로 기단을 마련하고, 맨 바깥 둘레에는 8모뿔대 주춧돌을 세우고 안두리기둥 밑에는 그보다 낮은 반구형(半球形)의 주춧돌을 받쳤다. 기둥은 모두 민흘림 둥근 기둥이고, 1층은 초익공, 2층은 2익공으로 되어 있다. 가구(架構)는 5량가(五樑架)로서 고 주(高柱) 위에 대들보를 건너지르고 그 위에 동자기둥을 세워 마루보를 받쳤다. 지붕마루는 모두 양성바름을 하였고 기와골 끝에는 막새를 사용하였다. 위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아래층 내진의 북동쪽 칸에 설치되어 있으며, 단청은 모로단청이다. 바깥 정면에 ‘守禦將臺’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고, 안쪽에는 ‘무망루(無忘樓)’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
본래 '장대'는 전투시 지휘가 용이한 지점에 설치한 지휘소다. 현대와 달리 장군이 직접 전장을 관찰하며
지휘했던 당시에 지휘소의 역할을 하는 장대는 성내에서 가장 높고, 지휘와 관측이 쉬운 곳에 설치하였다.
보통 한국의 성에서 장대는 단층 형태가 주류이나, 남한산성은 2층 누각형태다. 이와 같은 형태는 경기도
수원시의 수원 화성에서도 확인된다.
남한산성은 넓어서 총 5개의 장대를 설치했는데, 18세기 중엽에 모두 붕괴되어 터만 남아있다. 1751년
에 이기진(李箕鎭)이 영조의 명을 받아 서장대와 남장대를 2층 누각형태로 다시 세웠지만, 현재 남은 것
은 서장대다. '수어장대 守禦將臺"란 이름은 이 서장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서장대의 편액을 수어장대라
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지금의 수어장대 건물은 1896년 유수(留守) 박기수(朴岐壽)가 재건한 것이다.
1890년대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수어장대로 건물 안팎으로 일반인들이 여기저기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아 이미 군사 시설로서의 역할은 상실된 것으로 보인다.
수어장대는 전면에서 볼 때 크고 작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기둥을 세우고 내부에는 널마루를 설치하여
단조로운 난간을 둘렀다. 내부 천정에는 장반자를 귀틀 위에 깔아 단청으로 시문하였고 툇간 위의 반자
는 연등천정이다. 내진과 외진 사이 바닥에는 전을 깔고 한쪽에 계단을 설치하여 2층으로 오르내리게
되어 있다.
2층은 1층과 달리 변주에 판문을 달아 열고 닫을수 있게 되어있고, 바닥에는 마루가 깔려있다. 지붕
은 팔작지붕이다. 수어장대의 목부에는 모로단청을 시문하여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수어장대 내부
조선 인조 2년(1624) 남한산성을 쌓을 때 만들어진 4개의 장대 중 하나이다. 장대란 지휘관이 올라서서 군대를 지휘하도록 높은 곳에 쌓는 대(臺)를 말한다. 수어장대는 산성 안에서 최고봉인 일장산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어서 성 내부와 인근 주변까지 바라볼 수 있다. 이곳은 병자호란(1636) 때 인조(재위 1623∼1649)가 직접 군사를 지휘하여 청나라 태종의 군대와 45일간 대항하여 싸운 곳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1층 누각으로 짓고 서장 대라 불렀으나, 영조 27년(1751)에 이기진이 왕의 명령으로 서장대 위에 2층 누각을 지었다.
건물의 바깥쪽 앞면에는 ‘수어장대’라는 현판이, 안쪽에는 ‘무망루(無忘樓)’라는 현판이 걸려있는데, '無忘樓'란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아들 효종이 청나라에 대한 복수로 북쪽 땅을 정벌하려다 실패하고 죽은 비통함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건물의 규모는 1층은 앞면 5칸·옆면 3칸이고 2층은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2층 4면의 바깥기둥은 1층 의 높은 기둥이 연장되어서 이루어진 것이다.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으로 가장 화려한 팔작 지붕으로 꾸몄다. 지금 있는 건물은 1896년에 유수 박기수가 다시 고쳐 세운 것으로 인조 2년(1624)에 지은 4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중요한 건물이다.
수어장대 주변에는 수어장대 외에도 많은 문화유산들이 있다. 2층 누각의 무망루는 현재 수어장대 정면 우측에 새로운 누각을 세워 일반인이 보기 쉽도록 하였는데 청나라에 항복한 치욕과 원한을 한 시도 잊지말자는 뜻을 가지고 있는 가슴아픈 사연을 가지고 있다.
억울하게 죽은 이회 장군의 전설이 있는 매바위와 이회 장군과 그의 부인 그리고 벽암대사를 모신 경기 유형문화제 제3호 청량당의 모습도 보인다. 이승만 대통령 기념식수인 전나무,광주시 향토문 화유산기념물 제7호 탁지부 측량소삼각점,어정이라 불리우는 우물도 보인다. |
수어장대에서 바라본 남한산성 풍경. 바로 아래에 행궁이 보인다.
남장대 터
남장대(南將臺) 터
남장대 터는 성의 남쪽에 있는 제2남옹성 바로 안쪽에 있다. 주변 지형을 보더라도 장대가 위치할
입지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1788년 부윤(府尹) 이태영(李泰永)이 수어장대와 같이 이층으로 고치고
타운루(唾雲樓)라는 편액을 걸었으나, 지금은 둥글게 잘 다듬어진 주춧돌만 남아있다. 남장대가 있던
이 지역은 제2 남옹성치를 설치하여 장대 앞의 면적을 넓힘과 동시에 3개의 남옹성을 설치한 점 등을
고려할 때, 전략적으로 중요한 장대임을 알 수 있다.
동장대(東將臺) 터
동장대 터는 남한산성의 동쪽에 있던 장대로 수어청에 소속된 5영 중 좌영장이 지휘하던 동장대가 있던
곳이다. 동장대는 인조 2년에 산성 수축시에 설치되었고, 누각도 함께 건립되었으나 18세기 초에 붕괴된
것으로 보인다.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남장대와 서장대는 다시 수축하였으나, 북장대와 동장대는 다시 짓
지 않았다. 한봉성과 연주봉옹성의 축성으로 동장대나 북장대는 상징적인 의미만 있을 뿐 군사적인 실효성
이 없어졌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북장대 터
북장대 터
북문에서 동문으로 이어지는 성곽
멀리서 본 북문성곽
남한산성 행궁
남한산성의 행궁은 1624년(인조 2) 7월에 착공하여 1626년 11월에 완공된 조선시대의 별궁(別宮)
또는 이궁(離宮)으로, 후금(後金)의 침입에 대비해 백제 때의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해 축조하였다.
유사시에 임금이 임시로 머무르던 궁궐의 하나로, 병자호란 당시에는 임시 궁궐로 사용되었다.
원래는 상궐(上闕) 73칸, 하궐(下闕) 154칸 등 총 3단 227칸으로 이루어진 행궁이었으나 모두 불에
타서 없어지고,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지금의 산성호텔 뒤편의 언덕이 시작되는 곳에 위치하며,
일제강점기에는 면사무소가 있었다고 한다. 《남한지(南漢誌)》에는 숙종(肅宗)·영조(英祖)·정조(正
祖)가 영릉(寧陵)을 참배할 때 이곳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는데, 후대에는 지방관인 유수(留守)의
집무실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2001년 11월에는 이 행궁터 서쪽 바깥 담장과 안쪽 담장 사이에서 초기 백제 때의 토기조각이 발견
되고, 2개의 저장용 구덩이 시설이 확인됨으로써 남한산성이 백제 영토였음이 증명되었다. 2007년
4월 1일 사적 제480호로 지정되었다.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938번지에 있다.
남한산성 행궁(南漢山城 行宮) 남한산성 행궁이라 불리는 행궁은 1626년 6월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의 계책에 따라 완성된 것이다. 조선 시대의 남한행궁은 유사시 왕이 피난할 수 있도록 준비된 예비 궁궐이었다. 남한산 성의 행궁에 대한 발굴조사가 1999년 부터 한국토지공사 박물관에 의해서 시행되었다. 2007년 까지 총 8차에 걸친 조사에서, 신라 시대 대형 건물터가 발견되었다. 조선시대 왕이 머물렀던 남한산성의 행궁. 인조 대에 처음 지어진 이후 순조 대까지 증축 됐다. 현재의 행궁은 2012년 복원된 것이다. 통일신라 시대 대형 건물터는 동서 약 18m, 남북 53.5m 총 290평의 매우 큰 규모로, 안학궁의 외전 이 정면 11칸 49m, 측면 4칸 16.3m로 약 242평이라는 것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 굉장한 규모임을 알 수가 있다. 건물의 규모로 인해 궁궐로 쓰였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으나, 두꺼운 벽과 방충을 위한 시 설이 갖추어진 건물의 구조를 볼 때 대체로 창고로 쓰였을 것이라는 의견이다. 같이 발견된 기와는 크기가 매우 큰데 무게가 보통의 기와의 4배가 넘어 암기와는 한 장이 약 19kg 이고, 숫키와는 약 15kg이나 된다. 이것은 조선 시대의 중기와가 약 4 kg, 3.3kg인 것에 비하면 상당 한 무게이다.
행궁의 정문인 한남루(漢南樓)
漢南樓 주련(柱聯)에 쓰인 글은 다음과 같다. [外面] 守一城講龍虎韜 수일성강용호도 한 성을 지킬 용호영에 병법을 강의하고, 鎭百里閱豼貅士 진백리열비휴사 백리를 진압할 군대의 군사를 열병한다. 良刺史宣上恩德 양자사선상은덕 덕(德)있는 자사는 임금 은덕을 베풀고, 大將軍御下威信 대장군어하위신 대장군은 위신(威信)으로 부하 다스린다. [內面] 是地兼繭絲保障 시지겸견사보장 이곳은 누에치고 길쌈일도 보장해야하고, 暇日卽雅歌投壺 가일즉아가투호 틈이 나는 날엔 사랑노래와 투호를 한다. 縱未能復讐雪恥 종미능복수설치 언젠가는 복수하고 치욕을 풀 수 있도록, 恒存着忍痛含寃 항존착인통함원 항상 고통을 참고 원통함을 품고 있으라.
1892년 촬영된 남한산성의 정문인 한남루 행궁안으로 들어서면 왕이 다니는 중앙계단 어도(御道)와 양옆의 계단에서 높낮이의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행궁 내행전 조선시대에는 남한산성 행궁 외에도 수원행궁, 강화행궁, 전주행궁, 의주행궁, 양주행궁, 부안행궁, 온양행궁등이 있었다하는데 수원행궁과 더불어 남한산성행궁이 복원되면서 조선시대의 행궁문화를 엿보게 된다. 재덕당 상궐과 느티나무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피신와 47일간 머물렀던 역사적인 장소인 내행전 모습. 남한산성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결정적인 이유는 실제로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47일 동안 성안에서 왕정을 펼친 점이 크게 인정받았다는 후문이다. 그리고 둘레 11.7km(본성 9km, 외성 2.7km)에 달하는 성곽 자체에 4대문, 5개의 옹성, 16개의 암문 등으로 설계된 남한산성의 축조술이 동아시아 도시계획 기술과 부합된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남한산성은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약 24km 떨어진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자리 잡고 있다. 임금의 거처이던 외행전(사진) 옆으로는 좌승당이 그 뒷편으로는 숙종때 세워진 재덕당이 있다 외행전(外行殿)은 왕이 병사들에게 음식을 베푸는 곳으로 호궤(犒饋)라고 불렸다 외행전의 어좌(왕의 자리)와 일월오봉병(日月五峰屛) 내행전 대청에는 왕과 왕비를 상징하는 해와 달 그리고 다섯 개의 봉우리가 그려진 일월오봉 병 병풍이 눈에 들어온다. 왕의 침전에는 십장생도 병풍과 보료와 장침, 주칠조각경상, 발 등이 전시되어 있다. 내행전에 전시된 소품 중에는 왕과 왕비를 상징하는 해와 달 그리고 다섯 개의 봉우리가 그려진 궁중 장식 병풍인 '일월오봉도 병풍', 장수를 상징하는 십장생도 병풍, 봄, 가을이 그려진 사계산수도 병풍 을 비롯하여 보료와 장침, 묵호, 대나무지통, 향료 등이 당시 그대로의 모습으로 재현되어 있다. 좌승당(坐勝堂) 내행전을 지나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좌승당이 나오는데, 이곳은 광주부 유수의 집무용 건물이다. '좌승坐勝'이란 앉아서 이긴다는 의미로 반드시 이길만한 계책을 써서 적을 물리친다는 군사적 의지 가 담겨 있다. 「광주부읍지」(1871)에 의하면 14칸 건물이다. 왼쪽은 일장각, 오른쪽은 이위정으로 나가는 문이다. 이위정(以威亭). 행궁의 가장 위에 있어 전망이 좋다 좌승당 뒤편에는 이위정이란 정자가 있는데, 순조 17년 광주부 유수 심상규(沈象奎)가 활을 쏘기 위해 세운 정자이다.
남한산성 행궁 주변에는 울창한 소나무가 행궁을 둘러싸고 있다. 남한산성 행궁은 전쟁이나 내란 시 후방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한양도성의 궁궐을 대신할 피난처 로 사용하기 위해 조선 인조 4년(1626) 남한산성과 함께 건립되었다. 실제로 인조 14년(1636) 병자호 란이 발생으로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47일간 항전한 곳이다.
1. 외행전 앞에는 남한산성의 옛 모습을 촬영한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2. 일장각은 성안의 행궁터 중 하궐 왼쪽에 있었던 관아로 정확한 용도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8칸 규모의 건물이다. 3. 유한양행 임직원이 수어장대에서 기념촬영한 사진도 전시되어 있다. 4. 남한산성의 내행전은 담으로 둘러쌓아 부속시설인 상궐 남행관이 담 밖으로 설치되어 있는 폐쇄적인 구조이다. 상궐 전경
옛모습. 행궁(行宮) 상궐(上闕) 행궁(行宮) 하궐(下闕) 구중궁궐 처마자락 상궐, 하궐, 후원, 행각, 좌승당, 재덕당, 일장각, 이위정...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하고 만나고 싶어도 만나지 못하는 이도령과 춘향이가 될 첩첩담장들. 좌전 후원으로 이르는 돌계단이 보인다. 곧장 오르지 않고 담장으로 살짝 가리어 옆으로 계단이 나 있다. 처음 이곳을 오는 이들은 계단을 단번에 찾지 못한다. '아무나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는 깊은 뜻을 담고 계단이 보이지 않게 배치했다고 한다. 조상의 작은 지혜를 엿보게 된다. 행궁 서쪽 바깥 담장과 안쪽 담장 사이에서 초기 백제 때의 토기조각이 발견되었다. 이곳에서는 2개의 저장용 구덩이 시설이 확인됨으로써 남한산성이 백제 영토였음이 증명되었다. 와적지 발굴 당시 출토된 통일신라시대 기와 기와를 묻은 와적지에서는 통일신라시대 기와가 발견되었는데 당시 백제 영토엿던 이곳에서 통일 신라시대의 기와가 발굴된것이 흥미롭다. 조선시대 기와는 비교하기 위해서 두었다. 외행전 앞마당 에도 발굴 현장을 재연해 둔 통일신라시대건물지가 있다.
행궁안 외행전 앞마당에서는 복원에 앞서 발굴 작업이 이루어지고 이때 출토된 통일신라 유적을 해설사의 설명과 함께 살펴볼 수 있다. 자료도움 : http://www.travelnbike.com / http://ggholic.tistory.com/5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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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종각의 천흥사 동종(天興寺 銅鍾 국보 제280호)
천흥사 동종은 높이 170Cm, 입지름 100Cm로 몸체에 새겨진 명문에 따르면 고려 현종 1년(1010)에 주조
된 것으로 원래는 태조 4년(921)에 태조가 창건한 충청남도 천안시 성거읍 천흥리 천흥사에 있었다고 한다.
남한산성으로 언제 옮겨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 산성 내 시간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였으며 이후
일제강점기 이왕가박물관으로 옮겨지고 해방 이후 덕수궁 미술관을 거쳐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지금의 종은 원형의 문양 및 형태를 그대로 재현하되 타종 시 종 울림이 좋게 하기 위해 약 3배정도
더 크게 제작하였다.
행궁의 보호수 느티나무. 나무나이 210년
남한산성 위 쉼터 초가 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