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 세알과 까치밥
콩 세알과 까치밥에 대해 알아봅니다.
콩 세알과 까치밥은 주변과 더불어 살아갔던 시대의 이야기다.
학교에서 배우지 않고 유명 인사들이 전파 매체나 인쇄 매체에 계몽적인 홍보 활동을 하지 않았어도
생활에서 배우고 답습되었던 생활철학이었다.
지금은 콩 세알과 까치밥의 의미를 환경과 문화 및 복지에 적용하여 생활교훈으로 활용하고 있지만
그 시대에는 일상의 나눔이었다.
미사여구도 없이 단지 생활의 바탕으로 동식물과 함께 살아가는 자연철학이었고, 가치관으로 실천되었던 생활문화 자체였다.
동물과 식물들에게 배려하였던 그 시대는 먹고 살아가는 것이 풍족하고 모든 물질이 남기 때문에 그랬던 것은 아니다.
콩 한쪽도 나누어 먹는 경제철학이 생활에서 실천되었던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끼리, 사람이 동식물에게 나누어 주면서 살아가는 당시의 생활문화는 생활 미학이 살아있던 문화시대로 볼 수 있다.
콩 세알! 작은 것이다. 그러나 세알의 뜻을 보면 작은 것은 아니다. 세알에는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껍질에 담겨 있다.
어른들은 콩을 심을 때 세알을 한 구덩이에 넣었다고 한다.
한 알은 새들의 먹이로 심고 한 알은 땅에서 살아가는 벌레들의 먹이로, 한 알은 사람이 먹기 위해서 심었다고 한다.
가을에 감을 수확할 때도 마찬가지다. 열려있는 감을 모두 거두지 않고 새들의 먹이로 몇 알은 남겨두었다.
몸에 좋은 것이 있다면 싹쓸이 하는 사람들이 배우고 또 배워야 하는 공존 공생하는 지혜로움이다.
자연환경과 문화 환경은 생활정신이 담겨 있는 터전이며 삶의 질을 평가하는 바로 미터다.
사람과 사람, 사람이 동식물들과 나눌 줄 아는 정신이 있는 곳에 문화는 살아있다.
문화의 궁극적인 목적이 삶의 질(質)을 향상 시키는데 있는 것처럼, 삶의 질 향상은 산소마스크를 쓰고 인간들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땅 값이 지금보다 몇 천배 올라가고 커다란 자동차와 대궐 같은 아파트에서 살아간다고 삶의 질이 향상되는 것은 아니다.
수 천 만원 가는 희귀한 돌멩이를 거실에다 옮겨놓고, 오래되고 푸른 나무를 집안에서 기른다고 삶의 질이 향상되는 것도 아닐 것이다.
박제된 새들을 향기 없는 조화(造花)에 메달아 놓고 감상한다고 문화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콩 세알을 심어도 아깝지 않고, 감을 몇 개 남겨두어도 아깝지 않은 생활문화가 여러 분야에서 실천되는 것이 먼저다.
남겨두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못하며, 자연에서 살아가는 동식물들의 터전을 투자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풍토에서
생활문화는 발전하지 못한다.
역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공허함만 남겨주어 정신적인 갈등만 쌓여 갈 것이다.
삶의 만족은 즐거움이다. 가장 큰 즐거움은 사람이 사람에게 또는 사람이 동식물들에게 감동을 주는 즐거움이다.
콩 세알과 까치밥을 남기는 아름다운 즐거움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하고 사람이기 때문에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문화라는 이름도 사람이 갖고 있는 세계요, 거두고 남기는 정신도 사람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행복이다.
콩 세알과 까치밥에 담긴 뜻은 자연을 생각하고 사람을 생각하는 정신문화다.
간단한 이치를 알고 그것을 생활에서 실천하는 배움부터 갖추는 것이 큰 세계로 나가는 지름길이다.
교과서에서 의도적인 배움이 없어도 생활에 녹아 있는 나눔의 정신을 갖고 있는 사람이 문화인이다.
계몽적이고 투쟁적인 문화운동과 환경운동이 필요 없는 시대가 사람 살아가는 세상이다.
콩 세알과 까치밥의 뜻을 가정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변화하고 발전되는 방향으로 실천해야 한다.
일상에서 나누지 못하는 물질이 쌓이고, 나누지 못하는 사람들만이 존재한다면 즐거움도 없고 재미도 없는 세상이다.
열손가락을 남에게 펴 보이지 못하고 주먹을 움켜쥐고 살아가는 것도 즐거움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삶은 감옥에서 혼자
살아가는 것과 같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 마음과 물질을 나눌 때, 즐거운 싹이 사람들의 마음에서 돋아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