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성북동 삼각산 길상사(三角山 吉祥寺)

권영탁 2016. 9. 18. 16:38

성북동 삼각산 길상사(三角山 吉祥寺)에 대해 알아봅니다.



              삼각산 길상사(三角山 吉祥寺)


          법정스님                 길상화 김영한  



성북동 삼각산 길상사(三角山 吉祥寺)


길상사 건물 자체가 요정과 사찰의 극과 극이었다면 길상사와 관련된 주인공은 기생과 엘리트 시인의 극과 극이었습니다.

길상사의 여주인공은 김영한 입니다 (호는 자야, 기명은 김진향, 법명은 길상화입니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길상화는 겨우 15살 때 팔려 가다시피 시집 가지만 곧 병약한 남편이 죽어 과부가 됩니다.

시어머니의 혹독한 구박을 견디다 못한 길상화는 도망쳐 나와 권번으로 들어갑니다.

비록 기생이 되었어도 총명했던 길상화는 기예는 물론 수필집까지 출간할 정도로 문학에도 능하여 그 재주를 아끼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이중 유명한 독립운동 단체 흥사단의 한글학자 신윤국 선생님이 있습니다.

이 분의 후원으로 길상화는 일본 유학길에 오르지만 곧 신윤국 선생님은 조선어 학회 사건에 연루, 체포 됩니다. 

이 소식을 접한 길상화는 유학을 포기하고 귀국, 스승이 투옥된 함흥으로 갑니다.
함흥에서 길상화는 우연히 함흥 영생여고 영어 선생님이었던 백석 백기행을 만납니다.

곧 사랑에 빠진 백석과 길상화는 동거를 하게 되고 이를 알게 된 백석의 집안에서는 난리가 납니다. 

백석의 부모님은 백석을 3차례나 강제 결혼 시키지만 백석은 계속 첫날 밤에 도망을 칩니다.

결국 백석은 길상화를 데리고 만주로 도망가기로 결정하나 백석의 장래를 걱정한 길상화는 함흥에 머무르기를 간청합니다.

하지만 백석은 길상화의 설득을 듣지 않고 홀로 만주로 갑니다 (이렇게 백석 혼자 만주에 가게 한 것을 길상화는 평생 후회했답니다.).

해방이 된 후 백석은 길상화가 있는 서울로 오려고 하였으나 38선에 막혀 북에 남은 채 1995년 사망합니다. 

서울에 남은 길상화는 요정 운영에 성공, 대원각을 우리나라 3대 요정으로까지 키웁니다. 

 
또한 중년에는 늦깎이 대학생이 되어 중앙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내 사랑 백석" "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이라는 백석을 기념하는 책까지 출간합니다 (길상화의 백석에 대한 사랑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평생 백석을 잊지 못하여 해마다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에는 일체의 음식을 먹지 않았다고 하니까요.).


길상사 하면 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분이 법정 스님입니다. 

법정 스님과 길상화의 인연은 1987년 미국 LA에서 두 분이 처음 만나면서 시작됩니다. 

전부터 법정 스님의 무소유 철학에 감화되었던 길상화는 초면임에도 그 자리에서 바로 대원각을 시주하겠다고 제의하지만 법정 스님은 길상화의 요청을 거절합니다. 

이후 10년에 걸친 긴 줄다리기 끝에 결국 법정 스님은 길상화라는 법명을 지어주고 대원각의 이름도 길상사로 바꾸어 1997년 개원 법회를 엽니다.

이 자리에서 법정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 절이 부유해지거나 화려해지거나 번잡한 행사를 벌여 나간다면 아무 미련 없이 이 절을 떠날 것이다.

 나는 이 절이 소박하고 가난한 절이 되기를 바란다.” 스님 다운 말씀이시죠?

길상화도 기부하면서 법정 스님께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없는 것을 만들어 드려야 하는 데 있는 것을 내놓는 것이니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 나가는 요정을 부처님께 시주했다... 어느 정도 액수일까요? 1997년 당시 시가로도 대원각은 1000 억원 가치였답니다. 자산 가치는 그렇다 치더라도 매년 영업이익도 상당했을 텐데 이를 아무미련 없이 내놓았던 길상화나 다른 사람 같았으면 덥석 받았을 기부를 무려 10여년 동안 사양한 법정 스님이나, 두 분 모두 보통 사람과는 차원이 다른 분들입니다. 길상화가 돌아가시기 전 한 기자가 물었답니다. 1000억, 아깝지 않았냐고.. 그러자 길상화의 대답은... 1000 억이 백석의 시 한 구절보다 못하다고...멋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