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의 회혼시
다산 정약용의 생애. 여유당과 회혼시(回婚詩)에 대해 알아봅니다. ![]() 다산의 생애는 성장과 출사, 유배, 그리고 유배 이후의 노년기로 나눌 수 있다. 영조, 정조, 순조, 현종에 이르기까지 네 명의 임금을 거치면서 1762년에 출생하여 1836년까지 75세의 생을 살았다. 정조 때 22살의 나이로 처음 과거에 나가 28세에 대과급제하여 본격적인 벼슬 길에 오르는 듯하였으나 30세에 터진 천주교와 연관된 진산사건으로 벼슬길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하였고, 결국 39세 때 정조가 승하하면서 귀향하여 여유당에 머문다.
불태웠다는 이유로 처형당한 사건이다. 정약용의 생가인 여유당 모습 여유당은 정약용이 정조 서거 후 낙향, 경기 남양주 조안면 능내리 초천(苕川) (다산의 생가 앞을 흐르는 조그만 천)의 고향집, 그의 생가에 붙인 이름이다. 이 이름에는 당시의 상황과 이로 인한 그의 삶에 대한 태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여유당의 與(여)는 豫(예)의 고음으로 고대의 코끼리와 동물로 의심이 많음(느림을 상징)을 뜻하며, 猶(유)는 고대의 원숭이과 동물로 겁이 많음(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도사림)을 뜻한다. 여유당이라는 이름은 노자도덕경 15장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한다. 豫兮若冬涉川(예혜약동섭천) (豫(예)=與(여)) 조심하기를 겨울에 냇물을 건너듯하고 猶兮若畏四隣(유혜약외사린) 신중하기를 사방 이웃을 두려워하듯해라 이러한 그의 조심스러움과는 무관하게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신유박해가 일어나고 만다. 순조 1년 40세의 나이에 그는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황사영백서 사건으로 강진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 신유박해는 3형인 약종이 천주교 서적과 성물 상자를 옮기다 발각되어 다산 3형제가 의금부에 투옥되고, 3형인 약종은 사형, 2형인 약전은 완도군 신지면으로 유배를, 그리고 다산은 경상도 장기로 유배를 가게 된다. 18년째 유배생활을 하던 57세의 나이에 그는 목민심서 48권을 완성했고, 그해에 해배 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노년을 보냈다. 75세인 1836년 2월 22일 고향집에서 운명하였는데 이 날은 결혼한 지 6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고 한다. 그가 운명하기 3일전 남긴 회혼시는 가슴을 찡하게 만든다. 다산은 15세 때(1776년 음력 2월 22일) 16세인 아내 풍산 홍씨(홍혜완)와 결혼해 만 60년을 내외로 살았다. 회혼일(결혼한 지 60주년을 말함)을 기념하여 3일 전인 2월 19일 썼으나, 다산이 회혼일 아침에 세상을 떠나 그의 마지막 시가 되었다. (75세, 1836년). 아내는 다산 사후 2년을 더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78세, 1838년)
※한자: 농(穠): 꽃나무 무성, 척(戚): 친척, 근심, 슬픔, 하(霞): 노을, 새우, 술, 피(帔): 치마, 표(瓢): 표주박, 부(付): 주다, 맡기다
본 자료의 도표 및 시 등의 자료는 김경호 박사의 인문학 특강(2016.3.25) " 조선의 슈퍼스타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에서 가져온 것임. 작성자 원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