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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주 중 최대의 면적을 갖고 있는 퀘벡주

권영탁 2017. 6. 18. 11:24

'캐나다 주 중 최대의 면적을 갖고 있는 퀘벡주'에 대해 알아봅니다. 


퀘벡이미지

캐나다  퀘벡(Quebec) 

인구 약 51만명 (2011)

      

(1) 퀘벡의 성립과 발전
 
퀘벡 땅에서의 최초 인간의 발자취는 약 1만 2천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찾을 수 있다.
유럽사람들이 퀘벡땅을 최초로 찾았던 시기는 9~10세기경으로, 그 당시는 정착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150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퀘벡 이주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유럽인들이 이 곳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물론 당시 퀘벡에는 상당수의 원주민 부족 체제사회가 존재하고 있었다.
 
주요 역사적 사건을 중심으로 퀘벡의 역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퀘벡과 몬트리올의 형성
 
쟈끄 까르티에(Jacques Cartier)가 프랑스 왕의 명령으로 동양으로 가는 길을 찾아 대서양을 20일만에 건너
우연히 퀘벡의 첫 관문인 가스페(Gaspe)지방에 도착한 해가 1534년이었다.
하지만 퀘벡에 첫 발을 디디고 영토를 점령했던 쟈끄 까르티에는 이 곳에 정착하지는 않고 프랑스로 돌아간다.
 
이후 오늘날의 퀘벡시를 자리잡게 한 인물은 1608년의 사무엘 드 샹플렝(Samuel de Champlain)이었다.
원래 퀘벡이라는 말은 인디안 원주민어로 '강물이 좁아지는 곳'이라는 뜻이다.
새로운 프랑스로 불리던 퀘벡은 1603에서 1627년까지 단순한 모피 거래소에 불과했다.
그러나 혹독한 추위로 인해 1609년에는 겨울이 지난 후 프랑스인 생존자가 16명에 이르기까지 되었다.
1634년 트르와-리비에르(Trois-Rivieres)가 개척되면서 1642년에는 드디어 몬트리올까지 정착촌이 형성되었다.
 
식민지 쟁탈전과 캐나다의 상하분할
 
17세기와 18세기 프랑스의 개척자들은 아카디(Acadie)지방과 생로랑 강가를 따라 정착을 했었다.
삼림지역을 개척하며 여기저기 무역로를 열어 놓은 이들은 멀리 남쪽으로는 현재 미국의 루이지아나까지 그리고 캐나다
서부 지역까지 진출했었다. 한편 이 시기 영국 식민지는 대서양 연안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었다.



이같이 팽창하던 프랑스와 영국간의 식민지 경쟁은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다(1754년부터 1760년까지).
프랑스가 식민지 전쟁에 지원을 거의 하지 않았던 데 반해, 식민지 쟁탈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던 영국은
이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이 승리의 주역으로 나선 울프(Wolfe)는 아브라함 평원의 전투에서 몽깡(Montcalm)이 이끄는 프랑스 군에 승리,
1759년 퀘벡시를 점령하였다.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이 개척하며 일구워 왔던 몬트리올도 1760년부터 영국군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다.
 
1763년, 프랑스는 파리협정에 의해 누벨-프랑스를 영국에 넘겨주게 된다.
이리하여 퀘벡은 영국의 한 주가 되고 퀘벡에 사는 프랑스인들에 대한 동화정책이 시작되었다.
1965년 당시 캐나다의 인구 69,810명 대부분이 프랑스계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권력층은 모두 영국계여서 불어를 하는
사람들의 불만은 날로 높아졌다.
예를 들어 판사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개신교도여야 했는데, 불어권은 모두 가톨릭 신자여서 불어를 할 수 있는 판사가
한 명도 없었다. 따라서 영어로 진행된 모든 재판에서 불어를 사용하는 프랑스계는 부당한 처우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1773년 12월, 미국에서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이 터지자, 긴장한 영국은 문제가 캐나다까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1774년부터 회유책을 쓰기 시작했다.
 
1791년 영국이 새로 제정한 헌법은 프랑스계의 정치적 권력을 강화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즉, 식민지에 의회를 만들고 영어권으로 이뤄진 상부 캐나다(지금의 온타리오)-대부분이 미국의 독립 당시에 캐나다로
도망 온 보수 왕당파-와 불어권인 하부 캐나다(지금의 퀘벡) 두 부분으로 구분되었다.
 
연방법의 제정과 퀘벡의 독자적 의회구성
 
새로운 정치제도가 마련됨에 따라, 일부 정치 지도층은 불어권 캐나다의 권리와 세력을 강화할 것을 주장하며,
독립을 요구했지만 영국은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퀘벡 주민의 불만은 나날이 커져갔고 저항군이 결성되어 영국군과 여러 차례 충돌하게 된다.
독립운동의 진압에 나선 영국군은 1838년 마을을 불태우고 부녀자와 아이들을 집 밖으로 쫒는 등 탄압을 시작하여
수천명을 체포하고, 108명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이 중 60여명은 국외로 추방되었고 12명은 몬트리올에서 처형되었다.
 
영국은 퀘벡의 반발을 억압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1840년 통합법을 제정하여 두 부분의 캐나다를 하나로 통합시키고
영어를 유일한 공식 언어로 채택하였다. 이는 불어권 캐나다인들을 북미 지역에서 소멸되도록 한다는 판단에 근거한 것이었다.   
하지만 1867년 7월 1일 영국 북미법에 따른 캐나다 연방법이 그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면서 퀘벡, 온타리오, 뉴-브런스윅,
그리고 노바스코시아가 참가하였다. 연방법에 따라 퀘벡은 독자적인 의회를 구성하고, 연방의 간섭을 받지 않고도 교육 및 민권
등의 분야에서 자치권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퀘벡만의 특유한 문화를 연방으로부터 보호하고 이를 위해 불어를
영어보다 강조해야 한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어졌다.
 
퀘벡의 조용한 혁명
 
20세기에 접어들면서 퀘벡은 보다 도시화되고 이민자들의 진입이 대거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59년 모리스 뒤플레시(Maurice Duplessis)와 가톨릭 사제들의 거의 독재에 가깝던 정권이 종결되면서 퀘벡은 정치,
문화, 경제 등 사회 전역에 걸쳐 급속한 현대화를 경험하게 된다.
이 변혁의 시기는 퀘벡 역사가들로부터 <조용한 혁명> 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만인의 평등을 보장하는 기본 정신을 바탕으로 종교, 교육과 사회복지 제도의 개혁이 이루어진다.
이로 인해 새로운 분야의 산업이 탄생하고 여성들의 노동시장 진출도 대폭 증가한다.
 
그리고 1974년 불어가 퀘벡의 공식 언어로 선포되었고, <조용한 혁명>으로 승리한 르네 레벡(Rene Levesque)이 이끄는
퀘벡당은 1977년 프랑스 언어법을 선포하였다.
이로써 퀘벡이 불어권 지역으로서 특유의 문화와 정서를 유지해 갈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된 것이다.
 
퀘벡 독립의 좌절, 다문화 존중하는 퀘벡으로
 
독자적인 문화의 유지와 경제적 자립에 대한 자신감으로 1980년 퀘벡은 캐나다로부터 독립할 계획으로 국민투표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찬성 49.4%, 반대 50.6%라는 근소한 차이로 독립은 좌절되었다. 독립을 위한 시도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1995년 쟈끄 빠리조(Jacques Parizeau)가 이끄는 퀘벡당은 캐나다로부터 독립을 시도하는 2차 퀘벡 국민투표를 실시하였으나,
또 다시 과반수를 얻지 못해 독립계획은 무산되고 만다. 독립을 위한 퀘벡당의 이같은 노력이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루시엥 부샤르(Lucien Bouchard)를 앞세운 퀘벡당은 1998년 선거에서 승리, 집권당이 되었다.
 
퀘벡은 캐나다 연방 내에서 퀘벡의 지위를 재 정립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
북미에서 유일한 불어권 사회를 지키려는 노력과 함께 이민자들을 중심으로 한 다민족의 특성을 존중하고 세계를
향해서도 적극적인 문을 열고 있다.
 
2003년 선거에서는 쟝 샤레(Jean Charest)가 이끄는 자유당이 퀘벡당을 누르고 승리하면서 퀘벡 독립문제는 한동안
잠잠해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연방주의를 지향하는 자유당의 노력이 독립을 지향해온 퀘벡의 전통을 어떻게 혼합,
혹은 극복해 나갈 지가 차후 5년간의 과제 중 하나라고 하겠다.
 
(2) 퀘벡의 인구와 영토
 
광할한 땅과 자원
 
퀘벡의 영토는 1,667,926km2이다. 이 면적은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독일을 모두 합한 면적과 맞먹는다.
지정학적으로 퀘벡은 남쪽으로는 미국이, 동쪽으로는 뉴-브런스윅, 뉴펀들랜드 & 라브라도르주, 그리고 대서양을, 서쪽으로는
온타리오주와 접해 있다.
수 많은 도시 지역 외에도 퀘벡에는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광활한 삼림, 해양지대, 광산지대, 산업지대 등과 인간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은 북극지방이 있다.
이처럼 풍성한 자원 외에도 퀘벡이 세계 자연의 보고로 여겨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세계에서 가장 큰 강 중의 하나인
생로랑 강 줄기를 따라 자리잡은 수많은 호수와 강들때문에 전세계 담수 자원의 16%를 퀘벡이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퀘벡의 인구와 언어
 
퀘벡주의 인구는 2002년 현재 약 745만명으로 온타리오주에 이어 캐나다에서 두번째로 큰 규모이다.
1960년대에 트뤼도 수상은 영어와 불어를 캐나다의 공식언어로 삼고 퀘백주에서 프랑스 언어와 문화를 장려하는 정책을
펼쳐 지금의 2개의 공식 언어를 가진 캐나다가 생겨났다. 
 
이러한 전통으로 캐나다 10개 주 중 최대의 면적을 갖고 있는 퀘벡주는 프랑스에 이은 세계 제2의 불어권 지역이 되었다.
퀘벡의 가장 큰 도시인 몬트리올부터 세인로렌스강의 옛도시 가스펠 마을 등 퀘벡주 어디에서나 프랑스의 전통과 문화를
느낄 수 있다.
 
퀘벡주 인구중 약 83%는 불어권이며, 8%는 영어권, 그리고 또 다른 8%는 이민자들로 구성된 기타 언어권(이태리, 그리스,
포르투갈, 베트남, 아이티 등) 출신이다.
나머지 1%는 퀘벡주의 원주민이었던 아메리카 인디언이 퀘벡인구의 0.9%, 에스키모족이 0.1%를 차지하고 있다.

출처: 블루치즈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