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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재

운현궁(雲峴宮)

운현궁에 대해 알아봅니다.



운현궁(雲峴宮)          

2016년 09월 07일 (수) 송종복 sojobo@hanmail.net
  
▲ 송종복 문학박사(사학전공)ㆍ(사)경남향토사연구회 회장
 雲:운 - 구름 峴:현 - 고개 宮:궁 - 장원

 서울시 사적 제257호로서 종로구 운니동에 위치한다. 운현궁은 26대 고종의 잠저(潛邸)이며 흥선대원군의 사저이다. 5궁중에 임란 때 소실되지 않은 유일한 궁중이다.

 <운현궁의 봄>은 1933년 김동인이 쓴 역사소설이다. 흥선대원군의 일생과 조선말의 복잡한 내외정세 및 지배계급의 억압과 착취로 고통 받는 민중에 대한 연민을 적은 내용이다. 궁궐은 아니었으나 궁궐보다 더 큰 위세를 누렸던 집이다. 운현(雲峴)이란 서운관(書雲觀) 앞에 있는 고개인데 이곳에 집을 지어 1852년에 고종이 태어나서 12세까지 살았다.

 이 사저를 운현궁으로 부르게 된 것은 1863년 12월 9일 이명복(고종, 14세)이 이곳에서 민자영(명성황후, 16세)과 가례를 치러 운현궁이라 불렸다. 조선 왕조 27명 중에 적장자로 왕위로 계승된 분은 7명밖에 없다. 철종이 후사가 없어 6촌 고종(본명 이명복)이 왕위에 오르니, 왕의 생부인 이하응이 대원군의 위치를 굳혀 권세를 누렸다. 그는 외척을 근절하고 왕권 강화를 위해, 친척이 없는 무남독녀인 민자영(민비)을 간택해 자부로 삼았다.

 명성황후(민자영)의 고향은 경기도 여주이며, 장악원 첨정 민치록의 외동딸이다. 일찍 부모를 잃고, 삼촌 민승호(대원군 이하응의 처남)의 집에서 자랐다. 왕비가 된 그는 점차 정권욕이 생겨 민씨 성을 가진 친척을 규합해 대원군 정권에 맞섰다. 황헌의 <매천야록>에 ‘터를 다시 넓혀 주위의 담장이 수리(數里)나 됐고, 네 개의 대문도 설치해 대내(大內)처럼 엄숙하게 했다’고 하니 그 규모와 화려함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대원군이 죽은 뒤 운현궁은 장자인 흥친왕 이재면이 물려받았다. 1912년 흥친왕이 죽자 장손 이준용이 대를 이었다. 1917년 이준용이 후사 없이 죽자 고종의 손자이자 의친왕의 차남 이우가 양자로 들어와 운현궁을 지켰다. 그러나 이우가 1945년 8월 6일 일본에서 세상을 떠나자 장남 이청이 대를 이었다. 일제가 운현궁을 구황실 재산으로 압류했으나 그 후손이 거처하고 있었다. 운현궁은 왕실재산이 아닌1948년 미 군정청이  개인재산으로 판결이 내리자 이청 소유로 등기됐다. 이때부터 개인재산이 됐으나 운영이 어려워 일부는 분할해 양도했다. 1991년 서울시는 이청에게 운현궁(7천88㎡)을 사들여, 1993년 말부터 보수 복원해 1996년부터 일반에게 공개했다.

 한양의 4대궁(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은 거의 임란 때 소실돼 복구됐으나 운현궁만은 유일하게 보존돼 궁중으로 존속해 궁궐과 같이 사대문을 갖춘 곳이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요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 하듯이 옛날에는 천하를 호령한 궁이지만 지금은 천하에게 이쁘게 보이려는 꿍심이 가련하기만 하다. 




[이덕일 사랑]    잠저(潛邸)

이덕일·역사평론가 newhis19@hanmail.net

입력 : 2008.04.17 22:30

 
국왕이 즉위하기 이전에 거처하던 집을 잠저(潛邸)라고 한다. '주역(周易)'의 잠룡물용(潛龍勿用)에서 유래한 것으로 연못 속의 용이 승천(昇天)해 임금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국왕에게 잠저가 있다는 것은 정상적인 방법으로 즉위하지 못했음을 뜻한다. 선왕(先王)의 장자로 왕위를 계승했으면 궁궐에서만 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잠저가 있는 조선 국왕이 많다는 사실은 그만큼 조선 정치사가 파란이 많았음을 뜻한다. 태조 이성계를 비롯해 정종·태종·세종·세조·성종·중종·명종·선조·광해군·인조·효종·영조·철종·고종 등 15명으로서 27임금 중 절반이 훌쩍 넘는다. 잠저에 있다가 대통을 이으면 잠저를 본궁(本宮)으로 삼는데 태조는 고향인 함흥본궁(咸興本宮)과 개성의 경덕궁(敬德宮)이 있다.

어의궁(於義宮)은 인조와 효종의 잠저인데, 종로구 사직동의 상어의궁(上於義宮)과 나중 효종이 이주한 종로구 효제동의 하어의궁(下於義宮)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선조의 잠저도 사직동이라고 전하니 사직동이 왕기(王氣) 서린 지역인 셈이다.

영조는 즉위 후 '검암발참기(黔巖撥站記)'라는 글을 사관(史官)에게 넘겨준다. 연잉군(延礽君·영조)이 경종 1년(1721) 8월 15일 부왕 숙종의 탄일에 명릉(明陵)을 배알하고 돌아오는데 소도둑이 지나갔다. 연잉군은 검암(黔巖) 발참장(撥站將) 이성신(李聖臣)에게, "흉년에 배고파 그랬을 것이니 소는 주인에게 돌려주고 도둑은 관가에 고하지 말라"고 명했다.

이튿날 새벽녘에 서울의 잠저로 돌아오니 학가(鶴駕)가 기다리고 있었다. 왕세제가 된 것이었다. 이곳이 종로구 통의동의 창의궁(彰義宮)인데, 백성을 사랑하는 덕 때문에 천명(天命)이 내렸다는 뜻이다. 그러나 영조가 이 사실을 사관에게 쓰게 한 것은 경종독살설을 의식한 정치행위였다. 현재 은평구 진관내동에 있는 검암기적비(黔巖紀蹟碑)는 정조가 이를 기념해 세운 것이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이화장과 김구 주석의 경교장,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저 등이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된다는 소식이다. 선왕들의 본궁(本宮)도 복원해 역사문화도시로 만드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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