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 채플린(Charles Spencer Chaplin)'에 대해 알아봅니다.
찰리 채플린(Charles Spencer Chaplin) 영화배우, 영화감독 출생지 영국 신체 키165cm 가족 딸 제랄딘 채플린 데뷔 1914년 영화 '생계'
[고전외화] 채플린 회고 / 찰리 채플린, 1959 개요 찰리 채플린은 1910년 미국으로 건너가 풍자 희극인으로 유명해졌다. 굴뚝 모자에 통이 넓은 바지, 그리고 코밑 수염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그가 만드는 영화에는 항상 가난한 사람이나 불행한 사람들이 등장하며, 웃음 속에 감동을 주는 무엇인가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만든 《뉴욕의 왕》에서는 전쟁과 정치를 풍자하여 오해까지 받았으며 그 후 스위스로 이주하였다. 1975년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KBE 작위를 수여받았다. 대표 작품으로 《키드》, 《황금광 시대》, 《모던 타임즈》, 《위대한 독재자》, 《어깨총》, 《라임라이트》 등이 있다. 찰리 채플린은 치열한 20세기 현대사의 산 증인이며, 1950년대 반공주의 광풍(狂風)인 매카시즘의 피해자이었다. 인간을 기업의 이익을 내기 위한 도구로 여기는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비판한 영화 《모던 타임스》가 보수적인 사람들에게는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사회주의 작품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결국 찰리 채플린은 사회주의를 찬양한다는 이유로 미국에서 추방당해 스위스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그 후 그가 미국을 방문한 적은 83세 때 아카데미 시상식 때 한 차례뿐이라고 한다 . 노년에도 계속 스위스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2008년 마틴 시에프는 《채플린:삶》에서 채플린의 생애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채플린은 그저 큰 인물이라 부르기에는 너무나 위대한 사람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5년 슬픔이 가득한 세상에 찰리 채플린은 코메디를 선사하였다. 그후 25년간의 세월을 지나는 동안 세상에는 대공황과 히틀러의 등장이라는 큰 사건이 있었고 채플린은 자신의 작업에서 이를 비켜가지 않았다. 채플린은 누구보다 큰 사람이었다. 상심에 빠진 수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만큼의 웃음을 선사한 이가 채플린 말고 또 누가 있을 것인가."
1910년대의 찰리 채플린찰스 스펜서 채플린은 1889년 4월 16일 런던에서 출생하였다. 부모는 뮤직 홀에서 공연하는 가수이자 배우였다. 채플린이 3세가 되던 해 부모가 이혼하였으며 이후 어머니와 함께 여러 곳을 이사하며 자랐다. 채플린은 부모로부터 노래를 배웠으며, 할머니가 집시의 자손이라는 점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우리 가족은 언제나 뼈대만 앙상했다"고 어려웠던 시절을 회상하였다. 찰스 채플린의 아버지는 알코올 의존증이 있었으며 다른 여성과 결혼하였으나 그마저 오래가지 못했고, 채플린의 이복 형제는 병든 어머니를 모시고 힘든 생활을 하여야 하였다. 1901년 그의 아버지는 결국 알코올 의존증으로 인해 사망하였다. 어머니가 다시 가수 생활을 하게 되자 찰리 채플린은 워크하우스로 보내졌다. 채플린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뮤직 홀의 아역 배우로 무대에 섰는데 이는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 훗날 채플린은 어머니를 할리우드로 불러 같이 살았다. 채플린의 어머니는 1928년 사망하였다.
1914년 희극 영화에 출연한 채플린1910년부터 1912년까지 찰리 채플린은 자선 단체인 오드 펠로우 독립기사단에 함께 가입하고 있었던 프레드 카노와 함께 미국 순회 공연에 나섰다. 채플린과 카노는 1910년에 5개월 동안 순회를 마친뒤 영국으로 돌아갔다가 1912년 다시 미국으로 향했다. 순회 공연동안 채플린은 뒷날 스텐 라우렐로 널리 알려진 희극 배우 아서 스텐리 제퍼슨과 한 방을 썼다. 순회 공연이 끝난 후 라우렐은 영국으로 돌아갔으나 채플린은 미국에 체류하였다. 카모와 채플린의 연기는 맥 세넷과 같은 코메디 영화 제작자의 눈에 들었다. 맥 세넷은 채플린을 자신의 영화사 키스톤의 배우로 채용하였고 슬랩스틱 코메디 영화 《생활비 벌기》(영어: Making a living, 1914년 왼쪽의 사진)를 제작하였다. 그러나 영화는 흥행에 실패하였다. 맥 세넷은 채플린을 계속 고용하여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였다. 함께 영화 제작에 참여하였던 여배우 마벨 노르만이 세넷을 설득하여 채플린은 다시 한 번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채플린은 노르만 영화감독이 감독한 두 편의 영화에 출연하였다. 채플린은 여성이 감독하는 영화를 한다는 것을 내켜하지 않았으며 자주 의견 충돌이 있었지만,결국 두 편의 영화를 완성하였다. 이 초기 영화 두편은 이후 채플린의 영화와는 매우 다른 모습을 하게 되었다. 맥 세넷은 채플린의 연기를 탐탁하지 않게 생각했고 이번에는 노르만이 뭐라고 하든 채플린을 해고하리라 결심하였다. 그러나 영화가 큰 성공을 거두자 채플린은 매우 유명해졌다.
1914년 채플린의 두 번째 영화 베니스의 어린이 자동차 경주채플린은 맥 세넷의 키스톤에서 영화 배우를 시작하였다. 그는 초기 영화에서 좌충우돌하는 캐릭터를 창조하였고 영화 제작을 매우 빨리 배웠다. 채플린이 24세이던 1914년 제작된 두 번째 영화 베니스의 어린이 자동차 경주에서 채플린은 이미 전형적인 그의 캐릭터를 만들었다. 바로 이어져 제작된 영화 《마벨의 이상한 재난》(영어: Mabel's Strange Predicament, 1914년 2월 9일)에서 맥 세넷은 "코메디 다운 영화"를 주문하였고 채플린은 둥근 챙모자에 꽉끼는 웃도리와 헐렁한 바지를 입고 짧은 지팡이를 든 그의 전형적 모습을 선보였다. 채플린은 훗날 자서전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하였다. “ 난 정말이지 뭘 어떻게 해야 코메디 답게 보일 수 있을지 몰랐다. 어찌되었든 지난 번 영화 《살리기》 같은 모양새여서는 안 될 것이기에 모든 것을 한 번 뒤집어 보기로 했다. 작은 모자에 꽉끼는 웃도리를 입고 헐렁한 바지를 준비했다. 거기에 큼직한 구두를 신고 맥 세넷에게 보여주었다. 세넷은 좀 더 나이든 모습이었으면 좋겠다고 했고 나는 작은 콧수염을 붙였다. 콧수염은 내 원래의 표정을 바꾸지 않고 나이들어 보이기 위한 방편이었다. 난 이 캐릭터로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막상 분장을 마치자 나는 그 케릭터가 되었고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무대에 오르자 캐릭터가 완전히 태어나게 되었다. ”
당시 둥근챙의 더비 모자와 바지는 채플린의 장인이었던 희극 배우 "뚱보" 알버클의 것이었다. 거기에 동료 희극배우 채스터 콘킨이 꽉끼는 웃옷을 구해주었고 14 싸이즈의 구두는 동료 희극 배우인 포드 스텔링이 준 것이었다. 채플린은 구두의 좌우를 바꾸어 신었다. 콧수염은 희극 배우 맥 스웨인의 머리카락을 잘라 붙였다. 채플린이 스스로 구한 것은 작달막한 지팡이뿐이었다. 키스톤에서 활동하던 초기 채플린의 작품은 과장된 제스쳐와 슬랩스틱 코메디가 주를 이루었다. 채플린의 판토마임은 이전의 키스톤 작품보다 더욱 섬세하였다. 키스톤의 핵심은 보여주는 개그였고 이를 위해서라면 등장 인물을 짖밟고 차는 장면도 서슴없이 집어넣었다. 비평가들은 이 새로운 코메디가 저속하다고 평했지만 대중들은 열광하였다. 대중의 인기를 얻자 채플린이란 이름은 곧바로 영화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1914년 채플린은 《틸리의 구멍난 로맨스》를 비롯한 34편의 단편 영화에 출연하였다.
1916년 뮤추얼 필름은 채플린에게 12개의 영화를 제작할 것을 요청하면서 67만 달러를 지급하였다. 채플린은 이후 18개월에 걸쳐 12개의 영화들을 만들었다. 이때 만들어진 작품 가운데 《손쉬운 길》(Easy Street), 《어느날 오전》(One AM), 《전당포》(The Pawnshop), 《모험가》(The Adventurer) 같은 영화들이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영화들에서 여성 주인공은 에드나 퍼비언스가 연기하였고 이 외에 에릭 캠벨, 핸리 버그, 앨버트 오스틴과 같은 배우들이 출연하였다. 그의 영화들은 크게 성공하였으며 채플린은 미국의 대표적인 배우로 떠올랐다. 제1차 세계대전에 미국이 참전하게 되자 채플린은 미국정부가 발행한 전쟁 채권인 자유 채권의 대변인으로 활동하였다. 1918년 이후 채플린은 독자적인 영화 회사를 창립하였다. 그러나 키스톤, 에사나이, 뮤추얼 시기의 영화들은 이름을 바꾸고 재편집 되면서 끊임없이 재상영되었다. 훨씬 이후의 시기인 홈 비디오 시장이 만들어진 때에도 채플린의 영화들은 비디오로 다시 제작되어 팔려나갔다. 심지어 에사나이는 채플린의 옛 영화들을 잘라모아 채플린의 새영화로 판매하였다가 처벌되기도 하였다. 1933년에는 뮤추얼 시기의 12편의 영화에 음성을 입혀 다시 상영되었다.
《키드》에 출연한 찰리 채플린과 재키 쿠건1917년 뮤추얼 필름과의 계약이 종료되자 채플린은 퍼스트 네셔널과 8편의 영화 제작 계약을 채결하였다. 퍼스트 네셔널은 1918년부터 1923년까지 채플린의 영화 제작비를 투자하고 완성된 영화를 배포하였다. 퍼스트 네셔널이 영화의 제작에 관한 일들은 모두 채플린에게 일임하였기 때문에 채플린은 보다 여유있는 환경에서 영화의 질을 높일 수 있었다. 채플린은 할리우드에 자신의 스튜디오를 차리고 영화의 구성, 배우 섭외, 연기, 연출, 제작을 도맡아 일했다. 퍼스트 네셔널은 뮤추얼 시기와 같은 코메디를 원했으나 채플린은 보다 긴 이야기를 이루는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 이 시기 만들어진 영화 가운데에는 《어깨 총》(Shoulder Arms, 1918년), 《필그림》(The Pilgrim, 1923년), 그리고 <키드>(The Kid, 1921년) 등이 유명하다. 1919년 채플린은 메리 피크포드, 더글라스 페어뱅크스, 데이비드 그리피스 등과 함께 유나이티드 아티스츠라는 이름의 영화사를 공동으로 창업하였다. 이들은 유나이티드 아티스츠를 할리우드 시스템의 발전과정에서 점차 권력화되어가는 투자자와 상영관들로부터 독립적인 회사로 키우고자 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채플린은 독립적인 영화제작자가 되었으며 1950년대 초까지 유나이티드 아티스츠의 이름으로 영화를 제작하였다. 유나이티드 아티스츠 시기의 채플린 영화는 보다 긴 상영시간과 함께 예술적인 모습을 띄었다. 채플린은 무성 영화로 《파리의 여인》(A woman of Paris, 1923년), 황금광시대(The Gold Rush, 1925년), 《서커스》(The Circus, 1928년) 등을 제작하였고, 《모던 타임즈》(The Morden Times, 1936년) 등을 제작하였다. 《시티 라이트》는 코메디와 감성적인 연기의 절묘한 배합으로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1949년 영화 비평가 제임스 어그리는 《라이프》에 기고한 비평에서 "한 장면 한 장면이 모두 가장 위대한 연기로 채워졌다"고 극찬하였다. 《모던 타임즈》에서 관중들은 최초로 채플린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주해 1] 그러나 《모던 타임즈》의 대부분의 장면은 여전히 무성 영화였는데 이 때문에 《모던 타임즈》는 채플린의 마지막 무성 영화로 여겨지기도 한다. [편집] 위대한 독재자
위대한 독재자에서 히틀러를 풍자한 채플린채플린의 본격적인 첫 유성 영화는 1940년 제작한 《위대한 독재자》이다. 이 영화는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즘을 풍자하고 있다. 영화가 개봉될 당시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 여전히 중립을 표방하고 있는 상태였다. 채플린은 히틀러를 풍자한 "아데노이드 힌켈" 과 이발사의 1인 2역을 연기했고 베니토 무솔리니를 풍자한 "벤지노 나폴리니" 역은 잭 오키가 연기하였다. 이발사의 연인 "한나" 역은 모던타임즈의 여주인공이었던 파울레트 고다드가 다시 맡았다. 《위대한 독재자》는 나치의 유대인 차별과 군국주의를 풍자하고 있다. 이 영화로 채플린은 아카데미상의 감독상, 작가상, 배우상 부분의 후보로 지명되었다.
1931년 마하트마 간디와 함께한 채플린채플린은 좌파 정치 성향 즉, 진보적인 정치신념을 지켰다. 비록 초기 작품이 슬랩스틱 코미디이긴 하였으나 그때 이미 그의 작품에는 사회적 메세지가 담겨있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 그의 영화를 직접 만들게 된 채플린은 보다 자신의 정치성향이 드러나는 영화를 제작하였다. 자본주의와 나치즘을 비평한 1936년의 《모던 타임즈》와 1940년의 《위대한 독재자》는 그의 정치 성향을 확고하게 보여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제작된 《라임 라이트》와 같은 채플린의 영화는 보다 부드러워졌으나 여전히 사회의 소외된 계층에 대한 휴머니즘을 보여 준다. 그의 이러한 신념은 채플린의 예술적인 원천이 되었지만, 매카시즘의 미친 바람이 불던 미국사회에서 공산주의자로 몰려 탄압받았다.
1952년 채플린은 《라임라이트》를 홍보하기 위해 런던에 갔다. 후버는 이 때에 맞춰 미국 이민심사국에 채플린의 귀국을 거절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결국 이 요청으로 인해 채플린은 미국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이 결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 전쟁 이후 이런 선동이 횡행하는 것을 본적이 없다. 그들은 미국 황색언론의 선동을 근거로 나에 대한 중상모략을 일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더이상 미국에서 영화를 만들수는 없다. 나는 미국 영주권을 포기한다. ”
채플린은 스위스 브베이에 정착하였다. 이후 채플린이 미국에 입국한 것은 1972년 아카데미 명예상을 수상하기 위한 방문이 유일하다.
채플린은 1964년 자서전을 출간하였고, 1974년에는 자신의 무대 인생을 다룬 《영화 속의 내 생애》를 출간하였다. 채플린은 1977년 크리스마스에 스위스 브베이에서 사망하였다.(89세) |
'궁금'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항공기 퍼스트석 (0) | 2018.09.26 |
---|---|
류경정주영체육관(柳京鄭周永體育館) (0) | 2018.04.04 |
동계올림픽 종목 (0) | 2018.02.16 |
바라지 & 뒷바라지 (0) | 2018.01.10 |
남녀의 차이 (0) | 2018.0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