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생가 (明成皇后 生家)에 대해 알아봅니다.
조선왕릉 42기 분포도이며 능(陵)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하며 42기의 능 가운데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태조 원비 신의왕후의 능)과 후릉(정종과 정안왕후의 능)을 제외한 40기의
능이 남한에 있습니다.
㉠ 제릉(조선 제1대 왕 태조의 원비 신의왕후 한씨의 능 : 경기도 개성군 판도면 상도리)
㉡ 후릉(조선 제2대 왕 정종의 왕비 정안왕후 김씨의 능 : 경기도 개성시 판문구 영정리)
남한에 있는 40기 능이 2009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였습니다.
신분당선 판교역에서 여주역까지 경강선 전철(2016년 9월 24일(토) 개통)을 타고
경기도 여주시에 있는 명성황후 생가를 찾아 갑니다.
각자 전철을 타는 위치가 다르기에 목적지에 도착하는 노선도 일부 다르듯이 소인은 잠실역에서
8호선 전철을 타고 복정역에서 분당선으로 환승을 한 후 이매역에서 내려 경간선으로 환승을 하고선
여주역까지 가서 여주시내버스를 타고 명성황후 생가로 갔습니다.
누가 뭐라 하여도 세계에서 최고라 자랑할 수 있는 수도권 전철 연결망에 환승역이 거미줄처럼 연결되는
교통망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1995년 10월 8일 명성황후 시해 100주기에 맞춰 초연을 목표로 순조롭게 제작 진행되었지만
제작비 관계로 그해 12월 30일 감격스러운 첫 공연이였습니다.)
고종황제와 왕비 명성황후 민씨가 함께 잠들어 있는 합장릉 홍릉은 남양주시 금곡동 141-1번지에
있습니다.
명성황후와 고종의 진영 입니다.
권오창 화백이 그린 명성황후의 공식 진영 입니다.
명성황후의 사진과 초상화는 전해저 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주시 점봉사거리에 세워진 명성황후 좌상 입니다.
경강선 전철 여주역에서 시내버스로 환승한 후 여주버스터미널로 이동하였습니다.
그리고 버스터미널 앞에서 점봉초등학교 앞을 지나는 버스를 타고 점봉사거리에서
하차하고선 명성황후 생가까지 1.0km를 걸어서 갑니다.
점봉사거리에서 명성황후 생가까지 1.0km를 도보로 진행하고 있는데
가로등엔 소나무 문양이 새겨진 초롱이 메달려 있으며,
용입에는 붉은 여의주를 물고 있습니다.
명성황후 생가로 진입할 수 있는 매표소 입니다.
명성황후 생가 매표소 앞 넓직한 도로 입니다.
감고당(感古堂) 입니다.
도롯가에서 담장 넘어로 바라본 감고당 입니다.
1,000원으로 명성황후 생가 관람을 위해 입장 합니다.
먼저 명성황후 생가 유적지 안내도를 살펴 보고
지금부터 감고당(感古堂)을 둘러 보면서 관람하도록 하겠습니다.
감고당은 조선시대 제19대 숙종이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친정을 위하여 지어준 집이다.
인현왕후의 부친인 민유중(閔維重)이 살았으며 인현왕후가 폐위된 후 이곳에서 거처하였다.
이후 대대로 민씨가 살았으며, 1866년(고종 3) 이곳에서 명성황후가 왕비로 책봉된다.
왕비로 책봉된 명성황후는 과거 인현왕후의 일을 회상하여 '감고당(感古堂)' 이란 이름을 붙였다.
본래는 서울 안국동 덕성여고 본관 서쪽에 있던 것을 도봉구 쌍문동 덕성여자대학교 학원장 공관으로
옮겼으며 이후 여주시의 명성황후 유적 성역화 사업에 따라 경기도 여주시 명성황후의 생가 옆으로
이전·복원되었다 (두산백과)
감고당이 원래 위치해 있었던 곳은
서울시 종로구 안국동 덕성여고 본관 서쪽에 있었습니다.
1917년에 작성된 '경성부 관내 지적목록'에 기록된 감고당의 소재지는 안국동 26번지(1,243평)로
소유주는 명성황후 집안의 종손으로 당시 관훈동에 살고 있던 민정식(閔庭植)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후 1927년 작성된 목록에는 소유권이 민씨 일가에서 창덕궁으로 바뀌었으나 그 연유는 확실하게
알 수 없습니다.
1927년 이후 1945년 사이 감고당은 창덕궁에서 마포상인 임호상으로 변경되었고
1945년~1953년 사이에는 덕성학원이 임호상으로부터 감고당을 포함한 부지 일대를 구입하였다 합니다.
감고당의 원위치는 현재 덕성여자고등학교내 테니스코트장이라 합니다.
안국동에 있던 옛 감고당의 옛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에는 건물 2채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이 가운데 좌측 ㄱ자형 평면건물은 감고당, 오른쪽 ㄷ자형 평면건물은 온고당으로 당호를 구분하고
있으나 그 유래는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감고당이 안국동에서 쌍문동으로 옮겨 지은 것은 1966년의 일이죠.
이전 공사 후 건물은 덕성학원 이사장 공관으로 사용하다가 후에는 그의 후손이 거처하였고
이후 서울시 교육청에서 사들였으나 교육청의 고등학교 신축계획에 따라 감고당은 멸실될 위기를
맞습니다. 조선후기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이렇듯 유서 깊고 복잡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감고당은 역사속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었지만 이제 명성황후 생가와 인접한 여주 능현리에 이전
복원 하였습니다.
옛 감고당 사진
덕성여자고등학교 테니스장이 감고당 터랍니다.
항공사진으로 보는 경기고등학교, 감고당, 안동별궁 그리고 총친부 옛 건물
㉠경기고등학교(중앙 왼쪽, 지금의 정독도서관으로 운동장이 크게 보이는 곳)
㉡덕성여자고등학교(아파트처럼 보이는 건물) 운동장 북쪽의 감고당
㉢옛 종친부(한옥 지붕,)
덕성여고 교문앞 담장밑에 <감고당 터>라는 안내판이 있군요
감고당이 있었던 터
덕성여고 앞 감고당길 모습 입니다.
감고당길은 일요일과 공휴일엔 차없는 거리로 실시되고 있습니다.
감고당 안내도
밖에서 바라본 감고당 행랑채(아래 설명문 ④번) 입니다
감고당 안쪽 마당에서 바라본 행랑채 입니다.
행랑채의 마루 입니다.
소인이 어릴적 1950년 중반부터 ~ 1960년대 초까지 첩첩산중 두메산골에서 10년을 살았을 그때
겨울철 농한기가 되면 부모님은 볏짚으로 겨울내내 자리틀 앞에 앉아 철커덕~ 철컥, 철커덕~
철컥 소리를 내며 가마니를 짜는것을 수없이 보았는데 지금(2017년)은 민속촌 이외에서는 좀처럼
자리틀로서 가마니를 짜는 곳이 있을련지 모르겠습니다.
옛날, 옛날 아득한 옛날
자리틀을 이용하여 왕골로 돗자리도 짜고, 볏짚으로 멍석도 짜고 하였지요.
감고당 안쪽 마당에서 바라본 행랑채와 대문 입니다.
감고당 사랑채랍니다.
감고당 사랑채
중문채 문을 열고서 안채로 들어 갑니다.
감고당 안채 입니다.
감고당 담장 넘어엔 명성황후 생가 소원바위가 있습니다.
감고당 옆문으로 나와 명성황후 생가 소원바위로 갑니다.
감고당 담장 바로곁에 있는 명성황후 생가 소원바위 입니다.
소원바위 관련글 입니다.
명성황후 생가 소원바위와 감고당 안채를 한 앵글에 담아 보았습니다.
소원바위에서 바라본 감고당 사랑채
감고당 사랑채(왼쪽)와 안채
민가 마을
옛날, 옛날에는 시골 큰마을 어디를 가나 종종 볼 수 있었던 연자방아였는데 이제는 민속촌이나,
민속박물관에 가야만 볼 수 있는 연자방아는
민가 마을에서 기념품도 살 수 있으며
간단하게 요기를 채우며 시장기를 해결할 수 있는 먹거리 분식집도 있군요.
민가 마을 광장 입니다.
명성황후 순국추모비와 생가
명성황후 생가
받은 글
'문화, 문화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일의 아름다운 성(城) (0) | 2017.03.12 |
---|---|
보물 순례(1) (0) | 2017.03.01 |
2017년 정유년(丁酉年) (0) | 2016.12.25 |
옛 지명 갑비고차(甲比古次)인 강화도(江華島) (0) | 2016.10.06 |
운현궁(雲峴宮) (0) | 2016.09.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