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구지학(一丘之狢)'에 대해 알아봅니다.
출전
양운(楊惲)은 한(漢)나라 소제(昭帝) 때 승상을 지낸 양창(楊敞)의 아들이며,
사마천(司馬遷)의 외손자이다.(양운의 어머니, 즉 양창의 부인은 사마천의 딸이다.)
그는 가문이 좋은 데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젊은 나이에 요직을 담당했는데,
젊은 나이에 큰 명성을 누리다 보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해져 남의 미움을 많이 샀다.
양운은 특히 선제(宣帝)가 가장 총애하는 태복(太僕) 대장락(戴長樂)과 사이가 나빴다.
한번은 대장락이 누군가에게 고소를 당하자 양운의 소행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여 양운을
비방하는 글을 선제에게 올렸는데, 그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었다.
「양운은 흉노(匈奴)에서 항복한 자들로부터 선우(單于)가 살해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못난 군주는 대신이 나라를 다스릴 방책을 잘 세워도 이를 쓰지 않아 스스로 자기 몸을 둘 곳을
없게 만든다. 이는 마치 진(秦)나라 때 소인을 기용하고 충신을 주살하여 멸망에 이른 것과 같다.
만약 대신을 신임하였더라면 진나라가 지금까지 존속되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어리석은 군주는) 한 언덕에 모여 사는 오소리와 다를 바 없다.”고 하였습니다.
(惲聞匈奴降者道單于見殺, 惲曰, 得不肖君, 大臣爲畵善計不用, 自令身無處所. 若秦時但任小臣,
誅殺忠良, 竟以滅亡, 令親任大臣, 卽至今耳. 古與今如一丘之狢.)」
이를 본 선제는 화가 났지만 차마 양운을 죽이지는 못하고 삭탈관직하고 평민으로 강등시켰다.
양운은 관작을 잃은 후에 물러나 집에 있으면서도 마음에 불만을 가득 품고 살았다.
그는 땅을 사고 집을 새로 짓고, 빈객들과 널리 사귀면서 소일하고 지냈다.
친구인 손회종(孫會宗)이 “대신들이 내침을 당하면 근신하며 자기 과오를 고치려고 노력한다.
그러지 않으면 화를 초래하게 된다.”고 충고했다.
양운은 손회종에게 편지를 써 조정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는데, 나중에 누군가가 이를 고발했고,
양운은 그 편지로 인해 사형을 당하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한서(漢書) 〈양운전(楊惲傳)〉》에 실려 있다.
여기서 유래하여 ‘일구지학’은 서로 다를 바 없는 똑같은 부류를 비유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용례
많은 국민들은 정치인들이란 소속만 다를 뿐, 실상은 모두 ‘일구지학’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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