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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무한행복은 무주상에서(1)

경주 함월사 조실 우룡 큰스님의 법문 '무한행복(無限幸福)은 무주상(無住相)에서'를 알아봅니다.


우룡 큰스님은…
1933년 일본에서 태어나 한국으로 돌아와 1947년 해인사에서 고봉 스님을 은사로 출가,
1955년 동산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1963년 김천 청암사 불교연구원을 비롯해 화엄사ㆍ법주사ㆍ범어사 등에서 강사를 역임했다.
수덕사 능인선원, 직지사 천불선원, 통도사 극락선원 등 제방선원에서 정진했다.


집착이 복을 쫓는다


중생은 누구나 복을 좋아합니다. 복 있기를 원하고 복받기를 원합니다. 또한 복받기를 좋아해서인지, 복을 쌓고 덕 베푸는 일을 하고 싶어 하고, 실제로 복덕을 쌓는 선업들을 지으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나같이 쌓고 지은 복덕의 양(量)을 새기면서 살아갑니다. '내가 누구에게 어떤 복을 지었다'는 것을 따지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복을 지으면 자기 복을 자기가 받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복을 베풀 때 그 내용이나 수량 등에 얽매이게 되면 인과응보 수준의 복만을 받을 뿐, 굴레를 넘어선 대우주법계의 큰 복은 누릴 수가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진짜 큰 복을 얻고자 한다면 지은 복의 내용이나 수량에 집착함이 없이, 복 짓는 일에 진심과 정성으로 임해야 합니다.


진심과 정성이 아니라, 지은 복의 내용과 수량에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복의 폭은 점점 좁아집니다. 대우주법계에 가득한 무한행복이 나의 집착 때문에 자꾸만 멀어지는 것입니다.


반대로 지은 복의 내용과 수량 등에 집착하지 않고 진심과 정성으로 복을 쌓으면 법계의 무한행복이 그대로 나의 것이 되어 큰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곧 대우주법계의 무한행복과 하나가 되는 비결은 '무주(無住)'입니다. 머무름이 없는 복짓기, 집착 없이 행하는 복짓기라야 대우주의 진실을 체험할 수 있고 대우주의 무한행복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여러 경전을 통하여 '마땅히 머무르는 바 없이 복덕을 닦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강조하신 '머무르는 바 없이[無所住]'는 한 마디로 집착 없이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합니까? 먼 곳의 일은 그만두고 우리의 가족과 가정부터 되돌아 보십시오.


가족과 가정이라는 굴레 속에서 우리는 내가 '아버지'라는 집착, '어머니'라는 집착, 저 아이가 '내자식'이라는 집착으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집착에 따라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달라집니다.


머무르는 바 없이 집착하는 바 없이, 진심과 정성으로 살아야 행복한 삶이 열리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데, 집 안의 일에서부터 집착 하나를 떼내지 못한 채 서로를 대하고 있으니, 어떻게 거센 파도가 몰아치는 이 고해의 불행을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행복한 삶, 자유로운 삶, 진실한 삶과 자꾸만 멀어지게 될 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마땅히 머무르는 바 없이, 집착하는 바 없이 복을 지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가족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가족을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에게 집착을 합니다. 그 집착이 문제입니다. 그 집착이 사랑으로 가꾸고 만들어놓은 좋은 것들을 무위로 돌려 놓습니다. 어떤 때는  남남보다도 못한 관계에 빠져들기도 하고, 원수처럼 되어 버리기도 합니다.


부모들은 흔히 '내 자식놈인데 내 말을 안 듣고 거역한다'며 아들딸들에게 톡톡 쏘아붙입니다.


내가 낳고 기른 자식이어서 만만하고, 부모 자식 관계인지라 이해가 될 것이라 생각하고 함부로 합니다. 마음 밑바닥에 '내 자식이니까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집착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들딸들은 그들의 입장에서 나름대로 주관이 있기 때문에, 부모의 꾸중이나 톡톡 쏘는 말이 섭섭하게 들리고 억울하기까지 합니다. 부모와 자식의 사이이므로 막말을 하거나 부모의 멱살을 잡지는 않지만, 그 섭섭함과 억울함이 거꾸로 가슴속으로 들어가 맺히는 것입니다.


못된 자식을 둔 부모나 시어머니 며느리 사이도 섭섭함과 원망스러운 감정이 쉽게 맺힙니다. 그리고 뭐니 뭐니 해도 원망스러운 감정이 가장 많이 맺히는 사이는 부부입니다.


미움과 원망의 감정은 서로를 배신하는 굉장한 사건이 있어야만 맺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발단은 사소한 데서 비롯됩니다. 아내의 바가지 긁는 소리가 남편의 가슴에 꽉 맺혀 잊을 수 없게 되거나, 남편이 무성의하게 막 내뱉은 소리가 가슴에 꽂혀 풀리지 않게 되면 원망이 생겨나고, 그것이 얽히고설키면 원수 같은 사이로 발전하게 됩니다.


물론 모든 대화가 다 가슴에 맺히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 자취를 남기지 않고 살랑 지나가지만, 심기가 많이 불편할 때나 심한 모욕감을 느끼게 되면 가슴에 맺혀 풀리지가 않습니다.


'저이가 나를 이렇게 밖에 취급하지 않는구나.'

'나를 이런 사람으로 보아 왔구나.'

이렇게 실망감에 젖고 믿음이 깨어지면, 일이 생길 때마다 자꾸만 감정의 골이 깊어지는 쪽으로 몰고 갑니다.


'저 사람이 지난번에 그 소리를 하더니만, 마음속에 저런 속셈을 지니고 있었구나. 그래서 나한테 갈수록 이상한 행동을 하였구나.'


마침내는 부부 사이에 큰 싸움이 붙고, 싸움 뒤에 갈라서거나 서로를 더욱 미워하게 되면 내생까지 이어지는 원결로 정착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할 뿐 아니라 믿고 의지하는 부부·부모 자식·형제 사이라 할지라도, '사랑하기 때문에, 만만하기 때문에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집착을 일으켜 마음대로 말하고 마음대로 행동하면 결국은 무서운 원결을 만들어 함께 불행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큰 복을 여는 무주상


그럼 가정과 가족의 참된 행복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남편이다·아내다·아버지다·어머니다·아들이다·딸이다'고 하는 데 대한 집착 없이 가족들에게 이바지해 주어야 합니다. 가족끼리 함께하는 모든 일 속에서 구속하거나 구속되거나 집착하는 마음 없이 베풀어야 합니다.


이렇게 가족에게 이바지하고 베풀면 그 어디에도 머무르는 바 없이 복을 지을 수 있게 되고, 대우주법계의 무한행복을 수용하여 큰 복을 누리고 복된 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머무르는 바 없이, 얽매임 없이, 집착 없이 가족을 대하고 복을 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만이 아닙니다.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절에서의 이야기부터 해봅시다. 불자들의 절에 대한 시주는 너무나 얽매어 있습니다. 불사에 동참할 때도 스님의 권유로 하는 수 없이, 또는 경쟁 의식에서, 남의 말이 귀에 걸려 시주를 합니다. 그런데 불보살상을 모시는 데는 서로 돈을 내려 하면서, 길을 닦고 화장실을 만드는 데는 선뜻 시주를 하려는 이가 드뭅니다.


이것이 참된 시주입니까? 참된 복짓기입니까? 큰 복을 지으려면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나에게 돌아올 바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대상과 나의 주관에 얽매이고 결과에 집착하면 오히려 고통의 과보를 초래하게 되므로, 버리고 비우는 행을 통하여 참으로 자유롭고 행복한 길로 나아가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복을 짓는 척만 할 뿐 제대로 복을 짓지 못 합니다. 집착을 비우는 척만 할 뿐 제대로 복을 짓지 못 합니다. 물질은 주었어도 마음으로는 그것을 꼭 붙들고 있는 이가 많습니다.


돈을 주었으면 돈을 준 것으로 끝내야 하는데, 그 돈을 쓴 결과에까지 신경을 씁니다. 이렇게 되면 돈 그 자체에, 그리고 돈을 준 대상과 돌아올 결과에 얽매이는 꼴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복을 지었으면 바로 그 순간에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절이든 복지단체든 그 누구에게 복을 지었든, 복을 지은 즉시 입을 닫고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흐뭇한 감정까지 몽땅 버리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러나오는 기쁨까지 억누르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랑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질을 주었건 법문을 하였건 몸으로 봉사를 하였건, 복 지은 것에 대한 생각을 계속 지니고 다녀서는 안 됩니다. 복을 지었다는 생각을 비워야만 참된 복이 되고 도를 이룰 수 있는 공덕이 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늘 강조하셨습니다.


"보살은 마땅히 어떠한 상(相)에도 집착함이 없이 복을 지어야 하느니라. 무슨 까닭으로 상에 집착함이 없이 복을 지으라고 하는 것인가? 상에 집착함이 없이 복을 지어야 가히 헤아릴 수 없는 큰 복덕을 얻게 되기 때문이니라."


상(相)! 부처님께서는 상에 집착하지 않으면 원하는 행복만이 아니라, 한없이 큰 행복을 이룰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상(相)이란 무엇인가? 상은 모양입니다. 물질적인 모양을 갖춘 것[色]만 상이 아니라, 소리[聲]·향기[香]·맛[味]·감촉[觸]도 상이며, 고착된 생각 또한 형체 없는 상입니다. 곧 '내가 부모'라는 생각도 상이요. '저 아이는 내 자식'이라는 생각도 상이며, '내가 저 아이에게 무엇을 해줬다'는 생각도 상입니다.


'내가', '누구에게', '무엇을 해주었다' 이 셋 중 하나만 남아 있어도 상에 집착하는 것이며, 부처님께서는 이 세 가지 상을 모두 떠나 복을 지어라'고 가르쳤습니다.


물론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상을 비우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부처님께서는 '상에 집착하지 않고 복을 지을 것'을 강하게 권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까닭은 상에 집착함이 없이 복을 지어야 그 복덕이 헤아릴 수 없이 커지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이 이해가 됩니까?


사실 이 대우주법계에는 무한의 행복과 무한의 영광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나 스스로가 만든 상으로 마음의 문을 닫아 대우주의 무한한 영광과 행복과 펑화를 거절하며 살고 있습니다. 스스로가 문을 닫아 불행하고 괴롭고 슬프게 만든 것일 뿐, 그 누가 있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나'라는 상에 집착하여 일으킨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비우며 살게 되면 대우주의 무한 행복과 영광이 나에게로 옵니다.


잊지 마십시오. '나'라는 상에는 부모라는 상, 자식이라는 상, 윗사람이라는 상, 불자라는 상, 스님이라는 상, 공부를 많이 했다는 상 등등이 모두 포함되며, 이러한 상들이 대우주의 무한행복을 차단시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에 얽매여서 복을 지으면 훗날 조그마한 복은 받을지언정, 무한행복이라는 큰 복으로는 이어질 수가 없습니다. 만약 조그마한 복받음으로 만족한다면 집착 속에서 복을 지어도 괜찮지만, 무한행복을 원한다면 자꾸자꾸 집착을 비우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복 짓는 일 중에서 가장 앞에 있는 보시를 예로 들어 이야기하겠습니다.


보시가 무엇입니까? 베푸는 것입니까? 물론 베푸는 것입니다. 베풀어서 남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보시는 버리고 벗어버리는 행위입니다. 나와 내 것을 비우고 버리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상에 집착함이 없는 허공과 같은 마음으로 보시를 하라고 가르칩니다. 보시를 하면서 집착없고 텅 빈 마음을 가질 수 있으면 한량없는 복덕을 저절로 이루고 마침내는 해탈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금강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네 생각은 어떠하냐? 동쪽 허공의 크기를 가히 헤아릴 수 있겠느냐?"

"헤아릴 수 없나이다, 세존이시여."

"그렇다면 남쪽·서쪽·북쪽 등의 허공과 동남·서남·동북·서북쪽과 위·아래 허공의 크기는 가히 헤아릴 수 있겠느냐?"

"헤아릴 수 없나이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보살이 상에 집착함이 없이 베푸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의 복덕 또한 이와 같아서, 가히 헤아릴 수가 없느니라."


실로 허공의 크기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금강경의 말씀처럼 상에 집착함이 없이 허공과 같은 마음으로 보시를 하거나 복을 짓게 되면 대허공과 같은 크기의 행복과 영광이 나에게로 오게 되어 있습니다.


((2)로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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